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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미술품(북한 그림) > 북한 유화
UZ-197. 호수가 마을 (김형철,金形哲,공훈예술가,功勳藝術家, 2006년)114cm-78cm(약 48호)
판매가격 가격은 문의바랍니다. 010-8743-2261
원산지 북한
급수 공훈예술가,功勳藝術家
출생 1931년 11월 1일 함경남도 흥원군 보현리에서 출생
특징 1955년 평양미술대학졸업. 교원및 박사원 원장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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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품  명 标      题 : 호수가 마을
*작품규격 画芯尺寸 : 114cm-78cm(약 48호)
*원 산  지 作者国籍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 산  지 作者国籍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작년도 创作日期 : 2006 년
*작 가  명 作者姓名 : 김형철 金形哲 (공훈예술가,功勳藝術家)
====================================================================================
*김형철 金形哲 (공훈예술가,功勳藝術家)
평양미술대 박사원 원장역임 (83세 원로화가) 김형철
1931년 11월 1일 함경남도 홍원군 보현리에서 출생
1949년 평양미술대학 입학. 1955년 평양미술대학 졸업
1955년 평양미술대학 교원
1972년 강좌장, 대학박사원 원장, 과학연구과장
1983년 예술학학사. 1988년 공훈예술가 칭호수여받음
1989년 교수학직 수여
1961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 위원, 1989년 동맹중앙위원회 위원,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예술학부문 심의위원
현재 송화미술원 원로화가
대표작: 유화<전후복구건설자들>, <양잠실에서>, <눈사람>, <무송현성진공전투>, <탐구의 나날>
함경남도 홍원군 보현리에의 인테리 가정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인민학교, 중학교를 다니였다.
그의 할아벌지 김원섭은 <황성일보> 기자였고, 아버지 김호식은 반일 투쟁에 참가한 서화가이다.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고, 1947년 펴양미술대학에서 공부한 전적이 있은 보현중학교 교장 장윤광의
지도를 받아 그림공부를 하였다. 1949년에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전쟁의 어려운 기간이였지만, 사실주의 소묘원리와 방법, 공간과 거리, 립체와 형태, 찬색과 더운색에의한 자연의 변화무쌍한 색의 조화와 통일 등 조형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초적인 학습을 꾸준히 하였다
졸업후 (1955년 부터) 평양미술대학 교원으로 임명되여 최기 조각, 공예과를 담당 수업하였다.
그후 남신의주에 있는던 분교에서 전문부 학생들에게 대한 교수사업을 하였고,
1958년 대학이 평양으로 다시 나오면서 유화과를 담임하였다.
이 기간 정영만, 장재식, 김주현, 김의관, 배선재, 강훈영, 김삼곤, 김춘전, 리준언, 최하택등 회화,
조각학부 학생들을 담임하여 전문가로 키우는 사업을 하였다.
1972년 부터 소묘강좌장, 대학박사원 원장, 과학연구과장으로 대학의 미술창작과 과학연구사업을
책임지고 진행하였다.
그는 학생을 미술기초교육과 과학연구사업에 바쳐 왔던것 만큼 교육학적테두리안에서 미술창작활동을 벌렸다.
리론연구와 교수지도, 창작실천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던 만큼 교육학적원리를 떠난 감상적인 사의적형상은
그에게서 절대로 허용될수 없었다. 이것은 그이 작품들에게 그대로 표현되었다
구도적으로나 소묘적으로 새채적으로 정확한것을 추구하려는 엄격한 요구는 어떤 측면에서 작기의 창작적 흥분을
억제시키고 손발을 묶어 놓는 결과를 빚어내였다.
묘사에세 치멸성이 보장되고 있으나 감성적으로 뜨겁게 안겨오지 못하는 것은 여기로 부터 기인된다
그는 리론연구사업에서 대학의 교수교양에서 절실히 필요한 소묘문제를 주되는 분야로 설정하고 30여년에
걸쳐 그를 완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성과를 거두었다.
1950년대 미술교육에서는 미술기초교육과 관련한 또바른 교재나 강의안이 없었다. 다만 교원들이 경험을 주입하거나
<내 그리는대로 따라하라>는 식의 도제식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구현하는 북한 미술의 형상원리는 교육에서도 1차적으로 소묘학에 대한 체계화된
교과서집필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석룡, 문학수, 황헌영, 리순종 등 오랜경력을 가진 교육가들의 경험을 참작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면서 교과서 <소묘(63년)>를 지필하였으며
이소묘교과서들은 미술대학, 사범대학, 교원대학, 예술학원을 비못한 모든 미술교육부문의 유일한 교과서로 되었다.
소묘교과서가 무려 6차에 걸쳐 개작되여 출판된것은 이 책에서 바쳐진 한 교육일군의 숨은 노력을 그대로 엿볼수 있게 한다.
그는 1983년 예술학 학사, 1989년에 교수학직을 수여받았다.
1961년~67년 사이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 위원으로, 1989년 부터 동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예술학부문 심의위원으로도 사업하고 있다.
맏아들 김복남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도안창작가로 있으면서 조선화<안기고 싶은 품>을 미술전람회에
발표하여 1등상을 받았다
둘째아들 김수남은 평양미술대학 조선화학부를 졸업하고 창작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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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손상( 조선화경우는 찟어진 경우 등, 유화의 경우 유화가 떨어진 경우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 등록된 사진을 복사 또는 도용 및 모조품 제작은 절대하지 마십시오
www.koreadpr.co.kr 그림은 감상용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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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oreadpr.co.kr 그림은 감상용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창작년도 创作日期 : 2006 년
*작 가  명 作者姓名 : 김형철 金形哲 (공훈예술가,功勳藝術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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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 金形哲 (공훈예술가,功勳藝術家)
평양미술대 박사원 원장역임 (83세 원로화가) 김형철
1931년 11월 1일 함경남도 홍원군 보현리에서 출생
1949년 평양미술대학 입학. 1955년 평양미술대학 졸업
1955년 평양미술대학 교원
1972년 강좌장, 대학박사원 원장, 과학연구과장
1983년 예술학학사. 1988년 공훈예술가 칭호수여받음
1989년 교수학직 수여
1961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 위원, 1989년 동맹중앙위원회 위원,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예술학부문 심의위원
현재 송화미술원 원로화가
대표작: 유화<전후복구건설자들>, <양잠실에서>, <눈사람>, <무송현성진공전투>, <탐구의 나날>
함경남도 홍원군 보현리에의 인테리 가정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인민학교, 중학교를 다니였다.
그의 할아벌지 김원섭은 <황성일보> 기자였고, 아버지 김호식은 반일 투쟁에 참가한 서화가이다.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고, 1947년 펴양미술대학에서 공부한 전적이 있은 보현중학교 교장 장윤광의
지도를 받아 그림공부를 하였다. 1949년에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전쟁의 어려운 기간이였지만, 사실주의 소묘원리와 방법, 공간과 거리, 립체와 형태, 찬색과 더운색에의한 자연의 변화무쌍한 색의 조화와 통일 등 조형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초적인 학습을 꾸준히 하였다
졸업후 (1955년 부터) 평양미술대학 교원으로 임명되여 최기 조각, 공예과를 담당 수업하였다.
그후 남신의주에 있는던 분교에서 전문부 학생들에게 대한 교수사업을 하였고,
1958년 대학이 평양으로 다시 나오면서 유화과를 담임하였다.
이 기간 정영만, 장재식, 김주현, 김의관, 배선재, 강훈영, 김삼곤, 김춘전, 리준언, 최하택등 회화,
조각학부 학생들을 담임하여 전문가로 키우는 사업을 하였다.
1972년 부터 소묘강좌장, 대학박사원 원장, 과학연구과장으로 대학의 미술창작과 과학연구사업을
책임지고 진행하였다.
그는 학생을 미술기초교육과 과학연구사업에 바쳐 왔던것 만큼 교육학적테두리안에서 미술창작활동을 벌렸다.
리론연구와 교수지도, 창작실천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던 만큼 교육학적원리를 떠난 감상적인 사의적형상은
그에게서 절대로 허용될수 없었다. 이것은 그이 작품들에게 그대로 표현되었다
구도적으로나 소묘적으로 새채적으로 정확한것을 추구하려는 엄격한 요구는 어떤 측면에서 작기의 창작적 흥분을
억제시키고 손발을 묶어 놓는 결과를 빚어내였다.
묘사에세 치멸성이 보장되고 있으나 감성적으로 뜨겁게 안겨오지 못하는 것은 여기로 부터 기인된다
그는 리론연구사업에서 대학의 교수교양에서 절실히 필요한 소묘문제를 주되는 분야로 설정하고 30여년에
걸쳐 그를 완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성과를 거두었다.
1950년대 미술교육에서는 미술기초교육과 관련한 또바른 교재나 강의안이 없었다. 다만 교원들이 경험을 주입하거나
<내 그리는대로 따라하라>는 식의 도제식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구현하는 북한 미술의 형상원리는 교육에서도 1차적으로 소묘학에 대한 체계화된
교과서집필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석룡, 문학수, 황헌영, 리순종 등 오랜경력을 가진 교육가들의 경험을 참작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면서 교과서 <소묘(63년)>를 지필하였으며
이소묘교과서들은 미술대학, 사범대학, 교원대학, 예술학원을 비못한 모든 미술교육부문의 유일한 교과서로 되었다.
소묘교과서가 무려 6차에 걸쳐 개작되여 출판된것은 이 책에서 바쳐진 한 교육일군의 숨은 노력을 그대로 엿볼수 있게 한다.
그는 1983년 예술학 학사, 1989년에 교수학직을 수여받았다.
1961년~67년 사이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 위원으로, 1989년 부터 동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예술학부문 심의위원으로도 사업하고 있다.
맏아들 김복남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도안창작가로 있으면서 조선화<안기고 싶은 품>을 미술전람회에
발표하여 1등상을 받았다
둘째아들 김수남은 평양미술대학 조선화학부를 졸업하고 창작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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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산  지 作者国籍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작년도 创作日期 : 2006 년
*작 가  명 作者姓名 : 김형철 金形哲 (공훈예술가,功勳藝術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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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 金形哲 (공훈예술가,功勳藝術家)
평양미술대 박사원 원장역임 (83세 원로화가) 김형철
1931년 11월 1일 함경남도 홍원군 보현리에서 출생
1949년 평양미술대학 입학. 1955년 평양미술대학 졸업
1955년 평양미술대학 교원
1972년 강좌장, 대학박사원 원장, 과학연구과장
1983년 예술학학사. 1988년 공훈예술가 칭호수여받음
1989년 교수학직 수여
1961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 위원, 1989년 동맹중앙위원회 위원,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예술학부문 심의위원
현재 송화미술원 원로화가
대표작: 유화<전후복구건설자들>, <양잠실에서>, <눈사람>, <무송현성진공전투>, <탐구의 나날>
함경남도 홍원군 보현리에의 인테리 가정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인민학교, 중학교를 다니였다.
그의 할아벌지 김원섭은 <황성일보> 기자였고, 아버지 김호식은 반일 투쟁에 참가한 서화가이다.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고, 1947년 펴양미술대학에서 공부한 전적이 있은 보현중학교 교장 장윤광의
지도를 받아 그림공부를 하였다. 1949년에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전쟁의 어려운 기간이였지만, 사실주의 소묘원리와 방법, 공간과 거리, 립체와 형태, 찬색과 더운색에의한 자연의 변화무쌍한 색의 조화와 통일 등 조형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초적인 학습을 꾸준히 하였다
졸업후 (1955년 부터) 평양미술대학 교원으로 임명되여 최기 조각, 공예과를 담당 수업하였다.
그후 남신의주에 있는던 분교에서 전문부 학생들에게 대한 교수사업을 하였고,
1958년 대학이 평양으로 다시 나오면서 유화과를 담임하였다.
이 기간 정영만, 장재식, 김주현, 김의관, 배선재, 강훈영, 김삼곤, 김춘전, 리준언, 최하택등 회화,
조각학부 학생들을 담임하여 전문가로 키우는 사업을 하였다.
1972년 부터 소묘강좌장, 대학박사원 원장, 과학연구과장으로 대학의 미술창작과 과학연구사업을
책임지고 진행하였다.
그는 학생을 미술기초교육과 과학연구사업에 바쳐 왔던것 만큼 교육학적테두리안에서 미술창작활동을 벌렸다.
리론연구와 교수지도, 창작실천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던 만큼 교육학적원리를 떠난 감상적인 사의적형상은
그에게서 절대로 허용될수 없었다. 이것은 그이 작품들에게 그대로 표현되었다
구도적으로나 소묘적으로 새채적으로 정확한것을 추구하려는 엄격한 요구는 어떤 측면에서 작기의 창작적 흥분을
억제시키고 손발을 묶어 놓는 결과를 빚어내였다.
묘사에세 치멸성이 보장되고 있으나 감성적으로 뜨겁게 안겨오지 못하는 것은 여기로 부터 기인된다
그는 리론연구사업에서 대학의 교수교양에서 절실히 필요한 소묘문제를 주되는 분야로 설정하고 30여년에
걸쳐 그를 완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성과를 거두었다.
1950년대 미술교육에서는 미술기초교육과 관련한 또바른 교재나 강의안이 없었다. 다만 교원들이 경험을 주입하거나
<내 그리는대로 따라하라>는 식의 도제식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구현하는 북한 미술의 형상원리는 교육에서도 1차적으로 소묘학에 대한 체계화된
교과서집필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석룡, 문학수, 황헌영, 리순종 등 오랜경력을 가진 교육가들의 경험을 참작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면서 교과서 <소묘(63년)>를 지필하였으며
이소묘교과서들은 미술대학, 사범대학, 교원대학, 예술학원을 비못한 모든 미술교육부문의 유일한 교과서로 되었다.
소묘교과서가 무려 6차에 걸쳐 개작되여 출판된것은 이 책에서 바쳐진 한 교육일군의 숨은 노력을 그대로 엿볼수 있게 한다.
그는 1983년 예술학 학사, 1989년에 교수학직을 수여받았다.
1961년~67년 사이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 위원으로, 1989년 부터 동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예술학부문 심의위원으로도 사업하고 있다.
맏아들 김복남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도안창작가로 있으면서 조선화<안기고 싶은 품>을 미술전람회에
발표하여 1등상을 받았다
둘째아들 김수남은 평양미술대학 조선화학부를 졸업하고 창작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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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미술대 박사원 원장역임 (83세 원로화가) 김형철
1931년 11월 1일 함경남도 홍원군 보현리에서 출생
1949년 평양미술대학 입학. 1955년 평양미술대학 졸업
1955년 평양미술대학 교원
1972년 강좌장, 대학박사원 원장, 과학연구과장
1983년 예술학학사. 1988년 공훈예술가 칭호수여받음
1989년 교수학직 수여
1961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 위원, 1989년 동맹중앙위원회 위원,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예술학부문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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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홍원군 보현리에의 인테리 가정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인민학교, 중학교를 다니였다.
그의 할아벌지 김원섭은 <황성일보> 기자였고, 아버지 김호식은 반일 투쟁에 참가한 서화가이다.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고, 1947년 펴양미술대학에서 공부한 전적이 있은 보현중학교 교장 장윤광의
지도를 받아 그림공부를 하였다. 1949년에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전쟁의 어려운 기간이였지만, 사실주의 소묘원리와 방법, 공간과 거리, 립체와 형태, 찬색과 더운색에의한 자연의 변화무쌍한 색의 조화와 통일 등 조형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초적인 학습을 꾸준히 하였다
졸업후 (1955년 부터) 평양미술대학 교원으로 임명되여 최기 조각, 공예과를 담당 수업하였다.
그후 남신의주에 있는던 분교에서 전문부 학생들에게 대한 교수사업을 하였고,
1958년 대학이 평양으로 다시 나오면서 유화과를 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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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미술교육에서는 미술기초교육과 관련한 또바른 교재나 강의안이 없었다. 다만 교원들이 경험을 주입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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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창작방법을 구현하는 북한 미술의 형상원리는 교육에서도 1차적으로 소묘학에 대한 체계화된
교과서집필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석룡, 문학수, 황헌영, 리순종 등 오랜경력을 가진 교육가들의 경험을 참작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면서 교과서 <소묘(63년)>를 지필하였으며
이소묘교과서들은 미술대학, 사범대학, 교원대학, 예술학원을 비못한 모든 미술교육부문의 유일한 교과서로 되었다.
소묘교과서가 무려 6차에 걸쳐 개작되여 출판된것은 이 책에서 바쳐진 한 교육일군의 숨은 노력을 그대로 엿볼수 있게 한다.
그는 1983년 예술학 학사, 1989년에 교수학직을 수여받았다.
1961년~67년 사이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평론분과 위원으로, 1989년 부터 동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예술학부문 심의위원으로도 사업하고 있다.
맏아들 김복남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도안창작가로 있으면서 조선화<안기고 싶은 품>을 미술전람회에
발표하여 1등상을 받았다
둘째아들 김수남은 평양미술대학 조선화학부를 졸업하고 창작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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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손상( 조선화경우는 찟어진 경우 등, 유화의 경우 유화가 떨어진 경우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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